[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신돈에만 의지했던 부패 청산, 신돈 내치고 길 잃어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신돈에만 의지했던 부패 청산, 신돈 내치고 길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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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성공했다 좌절된 공민왕의 개혁
이익주 역사학자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자연에서는 해지기 직전 하늘이 잠깐 밝아지는 현상을, 사람이 운명하기 직전 잠깐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국가로 치면 멸망 직전의 짧은 전성기를 가리킨다. 고려가 멸망하기 전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31대 국왕인 공민왕의 치세(1351~1374)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개혁 정치를 추진해서 쇠퇴기의 고려를고금리전환대출
일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는 다시 암흑기로 빠져들어 18년 만에 멸망했으니, 공민왕의 정치는 회광반조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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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세력 전격 척결에는 성공했지만 지배층 비협조로 개혁은 지지부진
백성 수탈하는 불법 처벌하려 하자 폐쇄적 기득권 네트워프리워크아웃신청방법
크 거센 저항
불의의 암살당한 후 고려는 암흑기 공민왕의 잘못 아닌 시대의 한계 」
친원파 제거, 원은 한 달 뒤에 알아
개성에 있는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 [사진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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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물리친 것만으로도 위대한 국왕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그때 고려는 100년 가까이 원의 간섭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공민왕의 친형 충혜왕은 원에 끌려가 유배 도중에 죽기까지 했다. 원에서는 고려 여인 기황후가 궁중의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기씨 일족이 중심이 된 친원파 세력이 권프랜차이즈창업
세를 부리고 있었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인 1356년 5월 18일, 친원파의 거두 기철·권겸·노책과 그 아들·조카들을 궁궐로 초치해서 일거에 격살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군대를 출동시켜 압록강 국경에 방어벽을 치는 동시에 동북쪽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해서 영토를 수복했다. 치밀한 준비 끝에 전격적으로 실행된 반원(反元) 운동이었다. 어찌나 보안이납입최고기간
철저했는지 원에서는 한 달도 더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했을 정도다. 황후 일족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원 조정에서는 80만 대군으로 응징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자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한족 농민들의 반란에 대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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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묘의 공민왕 신당(神堂). 조선 왕실의 종묘에 공민왕 신당을 모신 이유는 불분명하다. [사진 국가유산청]
반원 운동의 일등공신은 공민왕 자신이었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뚤루게라는 이름의 인질로 원에서 생활하면서 농민 반란이 한창이던 원의 실상을 목격했고, 그로부터 아파트담보대출금리비교 뱅크하우스
반원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반원 운동 후 공민왕의 예상대로 원이 공격해오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만에 하나 군대 운용의 우선순위를 바꿔 고려를 침공했더라면 막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민왕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대모험이었다. 그런 모험에 성공했던 만큼 그 성과 역시 공민왕의 몫이었다. 충혜왕의 실정으로 추락작업진행률
한 국왕의 권위가 회복되고 공민왕의 왕권도 강화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공민왕은 곧 개혁에 착수했다. 권력자가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고 양인을 억압해서 노비로 만드는 불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았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려의 지배층 거의 전부가 불법에 연루되어 있으면서 국왕의 개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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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홍건적 침략, 운도 따르지 않아
경남 창녕군 옥천리에 있는 옥천사 터. 신돈의 어머니가 이 절의 노비였다. 신돈이 죽은 뒤 폐사되었다. [사진 창녕군]
공민왕에게 운도 따르지 않았다. 원나라lh대학생전세자금대출
세력을 몰아낸 뒤 왜구가 창궐했고,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이 침략해왔다. 홍건적 2차 침략 때는 수도 개경을 빼앗기고 왕이 복주(福州·경북 안동)로 피난을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홍건적은 원의 지배에 저항하는 한족 반란군이었다. 이들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공민왕의 반원 운동을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원과 다시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공민왕이 개경을 수복하고 환궁하는 길에 흥왕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사태에 어쩔 줄 모르다가 왕을 닮은 환관 안도치가 공민왕 대신 침대에 누워있다가 반군에게 살해되는,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때마침 개경에 있던 최영이 신속하게 군대를 끌고 온 덕에 공민왕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 뒤로는 개혁에 관심 없는 무장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렇게 해서 반원 운동 이후 10년 가까이 공민왕은 개혁이 지지부진한 채 세월을 허송했다.
공민왕이 그렸다고 알려진 문신 염제신의 초상화.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공민왕은 때때로 신하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1365년(공민왕 14년) 관료들이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며 공민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신대족(世臣大族)들은 친한 무리가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주고, 초야신진(草野新進)들은 속마음을 감추고 행동을 꾸미며 명망을 탐하다가 지위가 높아지면 집안이 별 볼 일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신대족과 혼인하고 처음의 뜻을 다 버린다. 유생(儒生)들은 겁이 많고 강직하지 못하며,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에 끌리니 이 셋은 모두 쓰지 못하겠다. 세속을 벗어나 혼자인 사람을 구해서 크게 쓰면 개혁하지 않으려 하는 폐습을 뜯어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려사』 신돈 열전) 세신대족은 예부터 관리를 배출해온 귀족 세력을, 초야신진은 시골에서 새로 올라온 신진 세력을 가리킨다. 공민왕이 보기에 당시 고려의 신구 세력 모두가, 심지어는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마저도 사적인 관계를 앞세워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개혁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놓은 해법이 기득권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은, ‘세속을 벗어나 혼자인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고, 부모·형제는 물론 처자식도 없는 승려 신돈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혔다.
신돈은 공민왕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행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라는, 토지(田)와 노비(民)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 기구를 만들고 스스로 책임자가 되어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전국에 방을 붙여 남의 토지를 빼앗았거나 양인을 노비로 만든 사람은 자진신고하고 원래대로 회복시키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권세가 중에 토지와 노비를 빼앗은 자들이 본래 주인에게 돌려줬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더 나아가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성인이 나셨다”고 칭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개혁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과 백성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신돈, 국왕처럼 행세 공민왕과 신돈의 결합은 처음부터 약점이 있었다.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에서 옥천사의 여종에게서 태어난 신돈이 환영받을 리 없었다. 또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한 관료들은 승려 출신 권력자가 출현하는 것을 경계했다. 개혁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돈의 권력이 오로지 공민왕의 신임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신돈이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고 모함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믿지 않던 공민왕이 차츰 신돈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의심이 점점 커지다 결국 신돈을 목 베 죽이기에 이르렀다. 1371년의 일로, 개혁은 6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는 신돈의 책임도 컸다. 관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자기 사람들로 조정을 채우고, 심지어는 국왕처럼 행세하기까지 했다. 부녀자들을 가까이한다는 추문도 심심찮게 들렸다.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관리를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책임이 더 컸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을 공고하게 만들지 못하고 측근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신돈이 죽임을 당한 뒤 공민왕은 다시 고립되었다. 더는 개혁을 계속할 의욕을 잃었고, 그저 왕위를 보존하기에 급급했다. 세신대족의 젊은이들을 모아 자제위(子弟衛)를 만들고 궁궐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동성애 상대가 되는 미소년 집단이란 오해도 있지만 실은 공민왕이 젊은 시절 원에서 목격했던 황제의 친위조직, 케식을 모방해서 왕을 호위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제위 소속의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뒤로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고려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공민왕의 실패는 시대의 한계라고 할 만하다. 지배층 전체가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개혁을 국왕 혼자 추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공민왕은 최선을 다했고 시대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도달한 지점이 다음 세대의 출발점이 되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